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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라노, 40년의 시간 위에 덧칠된 색 부라노를 떠올리면 먼저 색이 생각납니다. 물길을 따라 늘어선 집들은 파랑, 노랑, 분홍, 초록으로 선명하게 칠해져 있고, 그 색들은 물 위에 한 번 더 번져 또 다른 마을을 만들어 냅니다. 물 위에 세워진 작은 섬이 이렇게까지 선명한 색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지도 위에서 볼 때는 쉽게 상상되지 않습니다. 베네치아 석호 (潟湖, Lagoon) 북쪽에 자리한 이 섬은 겉으로는 동화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오랜 생업과 생활의 층위가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40여 년 전, 필자가 베니스를 방문하던 길에 무라노를 거쳐 이곳에 들렀을 때의 기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 당시 부라노는 직물공예, 특히 레이스 가게 몇 곳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산업이나 눈에 띄는 볼거리가 많지 않았던 조용한 어촌에.. 2026. 3. 3.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예수 세례의 역사적 현장 요르단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강이라기보다 물줄기라 부르는 편이 어울릴 만큼 잔잔한 흐름이 나타납니다. 모래빛 평야와 갈대 숲, 낮게 깔린 하늘 아래에서 이곳은 스스로를 크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조용한 강가가 지닌 이름은 오래전부터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불러 모았습니다. 바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오늘날 요르단의 알마그타스라 불리는 장소입니다. 많은 이들은 이곳을 한 장의 성화처럼 상상합니다. 맑은 강물, 빛이 쏟아지는 하늘, 경건하게 서 있는 인물들. 그러나 실제의 베다니는 생각보다 소박하고, 오히려 그 담백함이 이 장소의 의미를 더 또렷하게 만듭니다. 이곳은 웅장함이 아니라 ‘전환’의 공간이었습니다. 물 위에서 시작된 한 장면이 이후의 역사를 바꾸었기 때문입니다.강을 건너는.. 2026. 3. 3.
눈 속에서 이어진 시간, 츠루노유 온천의 역사와 오늘 아키타 깊은 산속에 자리한 츠루노유 온천은 단순한 온천 숙소라기보다, 시간이 겹겹이 내려앉은 한 장의 풍경처럼 느껴지는 곳입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답게 겨울이면 온 세상이 흰빛으로 잠기고, 초가 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온천 김은 마치 오래전 에도 시대의 한 장면을 지금으로 끌어당긴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이곳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숨 쉬는 생활의 공간입니다. 필자가 2010년에 처음 찾았을 때의 기억과 오늘날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도, 분명 미묘한 분위기의 변화가 느껴집니다.산속에 자리 잡은 이유 – 은광과 번(藩)의 보호츠루노유 온천은 아키타현 센보쿠시에 속한 뉴토(乳頭) 온천향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기원은 에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특히 아키.. 2026. 3. 2.
시드니의 속도를 잠시 내려놓는 곳, 코알라 파크 생추어리 관광지로만 보면 소박하고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시드니가 어떻게 ‘야생과 공존하는 도시’라는 정체성을 만들어왔는지를 이해하는 단서가 되는 장소입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일은 동물을 보는 일이기 이전에, 도시가 스스로의 뿌리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살펴보는 경험에 가깝습니다.식민 도시에서 생태 도시로Koala Park Sanctuary는 1930년대에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호주는 도시화와 농지 개간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코알라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들던 시기였습니다. 이 생추어리는 보호와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시드니는 원래 유칼립투스 숲과 암반 지형이 뒤섞인 땅 위에 세워진 항구 도시입니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자연은 밀려났지만, 동시에 호주는 ‘고유 생태’를 국가 정체성의 핵심으로 인식.. 2026. 3. 2.
오스트리아 오베른도르프의 작은 교회당, ‘고요한 밤’의 탄생지 오스트리아 북부, 잘츠부르크 인근의 작은 국경 마을 오베른도르프에는 강가를 바라보는 아주 작은 교회당이 있습니다. 화려한 대성당도, 웅장한 수도원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작은 공간은 매년 겨울이 되면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장소가 됩니다. 교회당의 이름은 ‘슈틸레 나흐트 카펠레(Stille Nacht Kapelle)’. 우리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으로 알고 있는 노래가 처음 울려 퍼진 자리입니다.강 위에 형성된 마을의 기억오베른도르프는 잘츠아흐 강을 사이에 두고 독일과 맞닿아 있는 마을입니다. 과거 이곳은 소금 운송의 중간 기착지였습니다. 알프스에서 채굴된 소금이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했고, 강변 마을들은 자연스럽게 물류와 교역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교회 역시 단순한 신.. 2026. 3. 1.
회색 구덩이 위의 계곡, 캐나다 아스베스토스 시의 과거와 현재 캐나다 퀘벡 남동부의 작은 도시, 과거 ‘아스베스토스(Asbestos)’라 불리던 이곳은 이름부터가 하나의 시대를 증언합니다. 거대한 석면 노천 광산이 마을 중심을 파내며 만들어낸 도시입니다. 회색 먼지가 바람을 타고 번지던 시절, 사람들은 이 광물을 ‘기적의 섬유’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 이름은 위험과 금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도시는 새로운 이름과 정체성을 선택했습니다. 이곳은 단순히 석면 산업의 몰락을 보여주는 장소가 아닙니다. 산업 도시가 어떻게 기억을 다루고 미래를 다시 설계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사례입니다.산업이 도시를 만든 이유이 도시의 형성은 단순합니다. 땅 아래에 세계 최대 규모 중 하나였던 제프리 광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말부터 채굴이 본.. 2026.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