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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래마니아, 기억과 일상이 함께 흐르는 쿠르드의 도시

by Eugene Global Footprints 2026.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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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래마니아 도시 전경
술래마니아 도시 전경

 

도시를 처음 만날 때 느껴지는 분위기는 단순한 풍경 이상의 것을 전합니다.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의 도시 Sulaymaniyah 역시 그렇습니다.

 

이라크 북부의 도시 술래마니아에 필자가 처음 도착했을 때의 인상은 예상과 조금 달랐습니다. 뉴스에서 보던 중동의 이미지와는 다른, 차분하고 조용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뒤편에는 낮은 산들이 이어지고, 거리에는 문화공간과 서점이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급하게 움직이기보다는 천천히 하루를 보내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2010년 8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이 도시에 머물렀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관광객이 보는 풍경과는 조금 다른 술래마니아의 내면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도시였지만, 그 안에는 쿠르드 지역이 지나온 역사와 긴장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쿠르드 문화의 중심이 된 도시

술래마니아는 18세기 말 바반 왕조에 의해 세워진 도시입니다. 쿠르드 지역의 행정과 문화 중심지를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 속에서 도시가 자리 잡은 이유도 그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제국과 국가의 경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인 방어 환경이 중요했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도시답게 술래마니아는 지금도 쿠르드 지역에서 문화적 분위기가 가장 강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학과 출판 활동이 활발하고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공간도 많습니다. 실제로 거리를 걸어보면 정치적인 긴장감보다 오히려 학문 도시 같은 차분한 분위기를 먼저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 차분함 뒤에는 쿠르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긴 역사가 함께 존재합니다.

붉은 박물관이 전하는 기억

술래마니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바로 Amna Suraka Museum입니다. 현지에서는 흔히 ‘붉은 박물관’이라고 부릅니다.

 

이곳은 과거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비밀경찰이 사용하던 감옥과 정보기관 건물이었습니다. 1991년 쿠르드 봉기 이후 시민들이 이 시설을 점령하면서 지금의 박물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박물관이 특별한 이유는 1988년의 쿠르드 학살과 깊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라크 정부는 Anfal Campaign이라는 군사 작전을 실시했습니다. 이 작전은 쿠르드 반군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진행되었지만 실제로는 마을 파괴, 집단 학살, 강제 이주,, 화학무기 사용까지 포함된 대규모 탄압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Halabja Chemical Attack입니다. 수천 명의 민간인이 독가스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므라 수라카는 이러한 탄압 체계 속에서 정보 수집과 구금, 심문이 이루어지던 핵심 기관이었습니다.

 

건물 외벽에는 아직도 총탄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내부에는 당시 사용되던 감옥과 조사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전시를 둘러보면 단순히 역사 자료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 사람들이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를 직접 마주하게 됩니다.

 

도시의 평온한 거리와 이 박물관의 분위기 사이에는 분명한 대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두 모습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도보다 길게 느껴지는 이동

쿠르드 자치지역으로 들어오는 주요 공항은 아르빌에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면 술래마니아와 아르빌 사이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 이동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2010년 이곳에 머물던 시절, 아르빌 공항으로 이동할 일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도로 자체는 그다지 험하지 않았으나, 길 위에는 여러 개의 검문소가 있었습니다. 차량은 여러 번 멈추었고 신분 확인과 차량 검사가 반복되었습니다.

 

그 과정이 특별히 위협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이동 자체가 단순한 이동이라기보다 상당히 번거로운 절차로 느껴졌습니다. 지도 위의 거리와 실제 체감 거리가 다르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지역이 오랜 시간 정치적 긴장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그런 순간에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6개월 동안 익숙해진 도시의 생활

6개월이라는 시간은 도시의 일상을 천천히 익히기에 모자라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침에는 시장이 열리고 낮에는 상점과 사무실이 움직입니다. 저녁이 되면 가족들이 외식을 하러 나오고 차를 마시는 공간에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술래마니아는 쿠르드 지역에서도 비교적 교육과 문화 활동이 활발한 도시입니다. 대학 주변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고, 서점과 카페도 보입니다. 도시 전체의 분위기는 중동의 다른 대도시보다 훨씬 차분한 편입니다.

 

물론 도시 밖의 현실은 항상 안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검문과 보안 절차는 생활 속에도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사람들의 일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양고기 중심의 식탁

이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먼저 익숙해져야 했던 것 중 하나는 음식이었습니다.

 

술래마니아의 식당 메뉴는 대부분 양고기 중심, 간혹 닭고기로 구성됩니다. 처음에는 다양한 요리를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선택지가 생각보다 단순했습니다. 닭은 대체적으로 크기가 매우 커서 질긴 편이었고, 자연스럽게 식사의 중심은 양고기가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아침, 점심, 저녁이 거의 양고기로 이어지는 날도 많았습니다. 여행이라면 흥미로운 경험이었겠지만, 몇 달 동안 계속되다 보니 그 기억이 꽤 강하게 남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도 양요리를 보면 잠시 망설이게 됩니다. 여행지의 음식은 단순한 맛뿐만 아니라, 그 시기의 기억과 함께 남기 때문입니다.

기억과 일상이 함께 존재하는 도시

술래마니아는 겉으로 보면 조용한 산악 도시입니다. 그러나 그 도시의 안쪽에는 쿠르드 사람들이 지나온 역사와 기억이 깊게 남아 있습니다.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 사람들, 시장에서 물건을 고르는 가족들, 그리고 도시 한편에 남아 있는 붉은 박물관. 이 장면들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시간 속에서 이어져 있습니다.

 

도시는 언제나 과거와 현재가 함께 흐르는 공간입니다. 술래마니아 역시 그렇습니다. 이 도시를 걷다 보면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기억과 삶이 동시에 이어지는 공간을 지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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