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아프리카의 바다는 생각보다 잔잔합니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대신, 넓게 펼쳐진 수평선과 부드러운 해풍이 도시의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서쪽으로 약 2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 테마는 바로 그 바다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도시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항구 도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테마는 바다를 매립하고 계획적으로 설계하여 탄생한 계획 산업 도시입니다. 가나가 독립 국가로서 미래를 준비하던 시기, 이곳은 단순한 항구가 아니라 국가의 산업과 경제를 이끄는 거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오늘의 테마를 걷다 보면 바다와 산업, 항구와 생활이 한 공간 안에서 조용히 섞여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관광지라기보다 한 국가가 미래를 설계했던 실험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독립 이후 가나가 선택한 도시 실험
1957년 가나는 아프리카 최초로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독립 이후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는 단순한 정치적 독립이 아니라 경제적 자립을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그 중심에 있었던 프로젝트가 바로 테마 항구와 산업 도시 건설이었습니다.
당시 아크라는 항구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고, 국가 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대형 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 항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선택된 곳이 지금의 테마였습니다.
이곳의 바다를 매립해 거대한 항구인 테마 항구가 만들어졌고, 그 주변으로 철강, 석유, 알루미늄, 제조 산업 단지가 조성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테마는 자연스럽게 생겨난 도시가 아니라 도시 계획에 따라 설계된 아프리카형 산업 도시가 되었습니다.
도시는 구획별로 나뉘어 있고, 주거지와 산업지, 항만 시설이 비교적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런 도시 구조는 지금도 테마의 공간적인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바다 위에 세워진 항구 도시의 생활 리듬
테마를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이곳이 산업 도시라는 점에 먼저 주목합니다. 거대한 크레인, 컨테이너, 화물선이 항구의 풍경을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걸어가 보면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항구 주변에는 여전히 작은 어선들이 드나드는 어촌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새벽이 되면 어부들이 그물을 정리하고, 해가 올라오면 어시장이 열립니다.
테마의 하루는 관광객의 시선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 도시의 리듬은 항구 노동자와 어부들,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 시간에 맞춰 움직입니다.
아침이면 항구로 향하는 트럭이 길을 채우고, 낮이 되면 시장과 거리 상점이 가장 활발해집니다. 해질 무렵이 되면 바닷가에는 다시 어선이 돌아오고, 작은 식당에서는 갓 잡은 생선을 구워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테마는 관광객에게는 산업 도시처럼 보이지만, 현지인에게는 바다와 노동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생활의 도시입니다.
테마에 전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들
도시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테마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항구 건설 당시의 바다 전설입니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 바다는 원래 영혼의 바다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항구 공사를 시작했을 때 예상보다 공사가 자주 중단되었는데, 일부 어부들은 이를 바다의 정령이 화가 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공사가 진행되기 전, 지역 전통 방식에 따라 바다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현대적인 산업 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전통적인 믿음이 여전히 영향을 미쳤던 사례로 종종 이야기됩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는 테마의 도로 구조입니다.
도시는 계획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사람들이 자주 지름길을 만들어 다니면서 원래 설계된 길보다 사람이 만든 길이 더 많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지에서는 이를 농담처럼 “도시는 계획대로 만들어졌지만, 길은 사람 마음대로 생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국과 테마를 잇는 인연
가나와 한국은 생각보다 오래된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테마에서는 한국 기업과 한국인의 활동이 적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가 지금은 타계하신 김복남 AFCO 회장입니다.
김복남 회장이 이끄는 AFCO는 가나에서 수산 가공 산업을 운영하며 현지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온 기업입니다.
테마 항구는 서아프리카의 중요한 수산 거점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생산되는 참치와 수산 가공품은 유럽과 세계 시장으로 수출됩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 기업과 기술, 그리고 한국인의 경영 경험이 현지 산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 한국과 가나의 경제, 외교적 교류를 잇는 핵심인물로 최고조 (한국명 최승엽) 주한 가나 대사가 있습니다. 가나에 35년간 거주한 한국계 1.5세로 2025년 주한 가나 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현지 주민들이 한국을 꽤 긍정적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한국 역시 전쟁 이후 빠르게 경제 성장을 이뤄낸 국가이기 때문에, 가나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국을 “발전 모델이 되는 나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산업 도시이지만 여전히 바다의 도시
테마를 걷다 보면 한 가지 느낌이 남습니다.
이곳은 분명히 산업을 위해 만들어진 도시이지만, 동시에 바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항구가 도시의 중심이고, 바다가 사람들의 생활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테마는 관광 명소가 많은 도시라기보다는 국가의 경제와 생활이 어떻게 바다와 연결되는지 보여주는 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나가 독립 이후 어떤 미래를 꿈꾸었는지, 그리고 그 꿈이 실제 도시 공간 안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이해하고 싶다면, 테마는 그 이야기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소 중 하나입니다.